- 평점
- 7.5 (2021.10.14 개봉)
- 감독
- 남궁선
- 출연
- 최성은, 백현진, 서영주, 유이든, 권아름, 손성찬, 김근영, 오태은, 송경의
2022년 6월 28일에 있었던 트레바리 시네마 토크 <십개월의 미래>를 함께 보고 나눈 이야기의 기록입니다.


0. 들어가기 전에
트레바리에서 시네마 토크 진행 제의를 받았다. 영화 선정부터 발제 준비까지 오롯이 준비해야 하는 일. 아주 소소한 활동비에 약간 마음이 꽁기했지만? 새로운 도전에 흔쾌히 수락했다.
트레바리 측에서 준 상영 가능 영화 목록을 하나 하나 검색하던 중 '십개월의 미래'가 눈에 띄었다.
십개월의 미래는 임신과 출산이라는 10개월의 과정을 간접 체험할 수 있는 VR 같은 영화다. 스크린과 매체에서 그동안 보여 준 적 없는 복잡한 임신의 여정을 겪는 두 남녀의 상황을 생생하고 실감 나게 담겨있다. 스물아홉 살의 개발자 '미래'에게 닥친 현실을 바라보고 이야기 나누며 우리의 '미래'를 상상해볼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해 더 고민할 것도 없이 시네마 토크 영화로 확정 지었다.
<다음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미래의 이야기
연인 관계였던 미래와 윤호의 계획 없는 임신. 미래는 당연히 당혹스럽다. 미래는 지금까지 꽤나 준법한 인간으로 살아왔다. 불법을 저지를 명분이 없다. 그러다 보니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갑자기 닥친 이 재난과 같은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생각이 많으면 시간이 사라진다'는 산부인과 상담실장의 말처럼, 시간을 빠르게 흘러간다.
코딩하는 개발자라는 설정처럼, 미래는 '정답'을 찾길 원한다. 딱 맞는 로직을 찾아 헤맨다. 그러나 미래 주변에는 명쾌하게 답을 주는 인물이 없다. 부모도, 애인도, 의사도, 독신 친구도, 선배 언니도. 결국 책임의 주체는 '미래' 뿐이다.
아이를 낳으면 자신의 커리어는 모두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다. 투자를 받아 중국으로 진출하는 내 뼈를 갈아 넣은 프로젝트에서도 빠져야 한다. 중국으로 가서 아이를 키우자는 미래의 제안에 윤호는 '그럼 애를 나보고 보라는 거냐'며 거절한다.
결국 미래는 윤호와 헤어지고 '카오스'라는 태명을 가진 자신의 아이를 낳는다. 영화 중반에는 임신 중절을 선택할 것이라 예측하기도 했었는데, 의외의 결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단순히 우유부단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은 아니다. 미래는 최후의 최후까지 고민했다.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미래가 도전을 마다하지 않고, 불확실성이 수용 가능한 인물이라는 미래의 성격과 어찌 보면잘 맞는 결말이기도 하다. 혼돈을 마주하고 새로운 우주를 열어가는 미래.
2. 윤호의 이야기
미래의 애인 윤호. 미래와 달리 윤호는 소식을 듣자마자 '결혼하고 아이를 낳자'며 기뻐한다. 이제 새로운 행복이 눈앞에 펼쳐질 거라 기대에 부푼다.
그러나 윤호는 가부장적인 가족, 양돈업을 하는 아버지의 밑에서 도망쳐 나온 아들이었다. 그의 원가족은 행복과는 거리가 멀고, 늘 자신을 짓누르고 억압하는 존재이다. 윤호는 가부장적인 모든 폭력을 거부한다는 듯이 '채식주의자'로 설정되어 있다. 그러나 엄마는 잘 구운 돼지고기를 젓가락으로 집어 윤호의 입에 넣어주는 사람이다. 아빠는 쓸데없는 일 하지 말고 가업이나 이으라며 돼지농가의 일을 억지로 맡기는 사람이다. 윤호는 가족의 억압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순응하면서도, 미래와의 미래를 포기하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중국에 가서 아이를 키우는 것은 거절한다. 윤호는 결국 아이는 엄마가 키우고, 아빠는 돈을 벌어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결정적인 순간에 결국 가부장제의 가해자가 되며 폭력의 고리를 끊어내지 못한 것이다. 윤호가 생각하는 '행복'은 정상성과 주류의 삶일 때만 가능한 것이었다.
3. 우리의 이야기
2020년, 한국은 낙태죄가 '헌법 불합치' 결정이 나며 불법이 아닌 것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 법안이 만들어지지 않고 계류되어 있는 상황이다. 현재는 합법도, 불법도 아닌 비법화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영화를 보기 4일 전, 미국 대법원은 여성의 낙태권을 인정했던 1973년의 '로 대 웨이드' 판례를 파기하기로 결정했다. 한 마디로 미국은 이제 (주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낙태가 불법이 되었다. 이 판결은 앞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미래는 (영화 시대 상황인 2018년에) 임신 중절이 불법이 아니었다면 이를 망설였을까. 우리는 법을 지키는 것이 정말 최선의 '선'일까. 법이라는 이름으로 권력은 어떻게 작동하고 유지되는가.
결국 '낙태권'은 철저히 정치적 상황에 따라 좌지우지되며, 어느 한쪽이 완벽한 선도, 완벽한 악도 아니다. 법과 도덕이란 이름으로 여성의 몸과 재생산권을 어떻게 통제하고 있는지, 이를 통해 이득을 보는 쪽은 어디인지 비판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4. FOR MY MOTHER
영화의 열두 번째 소제목이자, 엔딩 크레딧이기도 한 문구였다. 감독은 엄마이자 이 세상의 모든 엄마들에게 이 영화를 바친다고 했다.
청소년에게 영화를 바치고 싶다는 사람도, 29살의 모든 이들에게 바치고 싶다는 사람도 있었다. 나 자신에게 이 영화를 바치기 위해 오늘 토크에 참석했다는 멤버도 있었다. 또 아들을 둔 아빠들에게 이 영화를 추천한다고 하는 멤버도 있었다.
시네마 토크 홍보를 위해 인스타에 글을 올린 다음 날이었다. H에게 전화가 왔다. H는 대학 동기로, 이제 돌이 지난 딸이 있는 엄마가 되었다. 영화 같이 보고 참석하고 싶은데, 아기 때문에 갈 수가 없다는 연락이었다.
"애도 안 낳아본 사람들끼리 무슨 얘기를 한다고 그래"라며 자조적인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실제로 시네마 토크에 참석한 9명 중에 아들을 둔 아빠 한 분 빼고는 모두 아이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H가 생각났다. H와 H의 카오스이자 우주에게 이 영화를 바치고 싶었다.
5. 십개월의 미래, 십 년의 미래
영화는 십 개월, 40주 남짓한 기간 동안 벌어진 일이었지만, 미래의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다. 윤호와도 헤어지고 미혼모로서 우주를 키울 그가 마주할 어려움들이 얼마나 더 많겠는가. 미래의 십 년이, 아니 그보다 더 먼 미래의 미래가 행복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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