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타 가드(2024), <비판적 에코페미니즘>
*트레바리 <이상한 나라의 페미니즘> 3월 모임에서 진행한 독서 토론과 발제를 바탕으로 정리한 글입니다.
한강의 <채식주의자>에서 영혜는 언니에게 말한다.
“나는 이제 동물이 아니야 언니.”
그녀는 더 이상 고기를 먹지 않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아예 먹는 행위 자체를 거부한다. 영혜는 나무처럼 광합성을 하듯 아무 것도 먹지 않고 햇빛을 받으며 살기를 원한다. 영혜가 나무가 되고 싶다는 말은 단순한 도피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더 이상 다른 생명을 착취하지 않고, 완전히 다른 존재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를 묻는 도전이자 선언이다.
에코페미니즘은 바로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 인간이 자연을 착취하고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에코페미니즘: 교차적 억압 속에서 여성과 자연을 함께 바라보다
마리아 미즈(Maria Mies)와 반다나 시바(Vandana Shiva) 같은 초기 에코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이 자연과 더 가깝고 생명 창조적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이를 통해 대안적 생태 사회를 구축해야 한다고 보았다. 시바는 서구 근대 과학과 개발 논리가 자연과 여성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분석하며, 이에 맞서는 ‘어머니 지구’로서의 여성 생태적 삶의 방식을 강조했다. 반면 그레타 가드(Greta Gaard)는 여성을 자연과 동일시하며 여성의 역할을 본질화할 위험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비판적 에코페미니즘>을 통해 에코 페미니즘과 신유물론·탈식민주의·퀴어이론 등을 결합하여 인간과 비인간 존재의 관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탐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에코페미니즘은 단순히 ‘에코(환경) + 페미니즘(여성)’의 병렬이 아니다. 이는 교차성(intersectionality)의 관점에서 성차별과 환경 착취가 같은 지배 구조 속에서 발생한다는 점을 분석하는 시각이다. 흑인 페미니즘이 “흑인 여성은 인종차별과 성차별을 동시에 경험하기 때문에 두 억압을 분리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듯 에코페미니즘도 여성 억압과 환경 착취가 분리될 수 없는 문제임을 밝힌다. 여성과 자연이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이 아니라 둘 다 근대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속에서 대상화되고 수탈당해 왔다는 점에서 연결되는 것이다. 특히 남반구 여성들은 개발과 산업화 과정에서 자연과 함께 착취당해왔다. 농업과 공동체 기반의 삶이 붕괴되면서 여성들은 생존의 터전을 잃고 경제적으로 더욱 취약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구조적 문제 속에서 여성 해방은 단순히 젠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넘어 환경과 인간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는 문제로 확장된다.
신체 횡단성과 정동: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 확장하기
정육점에 놓인 고기를 보며 어떤 사람은 단순히 먹을 것을 떠올리지만 어떤 사람은 자신의 몸이 아프고, 속이 울렁일 정도의 고통을 느낀다. 이는 단순한 윤리적 신념의 문제가 아니라 정동(affect) 차원의 반응이다. 신체 횡단성(transcorporeality)은 바로 이 지점에서 작동한다. 우리의 몸은 독립된 개체가 아니며 환경과 얽혀 있다. 우리가 숨 쉬는 공기, 우리가 먹는 음식, 우리가 소비하는 모든 것이 우리의 신체와 결합되어 있다. 이 개념은 우리의 신체가 자연과 비인간 존재들과 상호 침투하며 연결되어 있음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에코 에로시즘(eco-eroticism)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자연과 인간이 단순히 대상화하거나 보호해야 할 관계가 아니라, 감각적이고 정동적인 교류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사고이다. 이러한 신체적 감각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기존의 도구적 관계에서 감각적 관계로 변화시키는 중요한 실천이 된다.
자본주의, 지속 가능한 발전, 그리고 착취의 문제
불꽃놀이를 보며 감탄하는 순간을 떠올려보자.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불꽃을 이루는 화학물질이 어디에서 채굴되었는지, 그것을 제조하는 과정에서 어떤 노동 착취가 있었는지, 그리고 그 불꽃이 하늘에서 사라진 후 대기와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고려되지 않는다. 오색찬란한 빛으로 터지는 폭죽에 제국주의와 지배적 남성성은 가려진다. 이는 착취가 성차별적이자 환경문제임을 드러낸다.
젠더와 환경의 억압이 같은 지배 구조에서 비롯된다면, 이를 강화하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해야 한다. 자본주의는 인간과 자연을 자원으로 삼아 끝없이 소비하도록 부추긴다. 우리는 상품을 소비하면서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착취와 파괴를 보지 않도록 훈련받는다. 우리는 마트에서 ’소고기 beef‘를 사면서 ’소 cow‘가 도축의 과정을 보지 않는다. 우유를 사면서 그것이 소의 젖을 어떻게 착취한 결과인지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부재 지시 대상’은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 중 하나다.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개념도 결국 자본주의적 성장이 전제된 착취에 불과하다. 자본주의가 유지되는 한 지속 가능한 발전은 실현될 수 있을까? 근본적으로 자본 중심의 성장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는다면 한계는 분명하다. 기술 발전이 기후 위기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기대도 결국 시장 논리 안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오히려 새로운 착취 구조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발전을 멈춰야 하는가? 만약 질병 치료와 같은 기술적 발전이 가능성을 확장하는 영역이라면, 우리는 이를 포기할 수 있는가?
맥락적 채식주의: 덜 착취하는 방식으로 전환하기
우리는 흔히 채식이 비착취적이고 윤리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하지만, 채식 또한 착취의 구조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동물학에서는 종종 식물을 ‘고기처럼’ 다룬다.식물학에서는 생명의 위계를 설정하는 것이 가능한지 물으며, 채식을 하는 것도 결국 착취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한다. 이는 동물을 보호해야 한다는 논리가 식물에게까지 확장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채식을 하는 것도 착취라면, 완전한 비착취가 불가능하다고 한다면, 왜 우리는 여전히 채식을 해야 하는가?
완전한 비착취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채식의 의미를 무효화하지 않는다. 윤리적 소비의 목표는 착취를 0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덜 착취하는 방향으로 전환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맥락적 채식주의(Contextual Vegetarianism) 개념이 제시된다. 맥락적 채식주의는 단순히 ‘육식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닌, 우리가 먹는 음식이 어디서 왔으며 그 과정에서 어떤 존재들이 영향을 받았는지를 인식하는 것에 초점을 둔다. 이는 내가 속한 환경에서 덜 착취하는 방식을 고민하게 한다. 결국 채식은 비착취적인 삶을 향한 연습 과정이다.
결론: 함께 되기(becoming-with) 를 실천하기
에코페미니즘은 단순한 환경 보호 운동이 아니다. 이는 인간과 비인간이 맺고 있는 관계 자체를 새롭게 구성하려는 시도다. 또한 취약한 존재들의 연대이자 해방이며, 비인간 존재와의 공존을 고민하게 하는 사상이다. 이제 페미니즘은 지구타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일, 젠더에 얽매이지 않고 생물종과 퀴어성을 고려하는 젠더를 그려가는 작업이 필요한 때이다. 당장 ‘영혜’처럼 나무가 되기를 선택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무와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찾을 수는 있다. 오늘의 나는 고기를 덜 먹고 채식을 하는 것으로 덜 착취하는 하루 하루를 만들어가야겠다.
'이상한 나라의 페미니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관절 사랑이란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환희의 책』 독서모임 리뷰 (0) | 2025.04.21 |
---|---|
12월 여의도와 남태령에 출현한 불안정한 신체와 연대 (feat. 주디스버틀러) (0) | 2025.02.17 |
[트레바리] 교차성X페미니즘 독서모임 발제 및 모임 후기 (feat. 신당역 사건의 교차성) (0) | 2022.10.01 |
[트레바리]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 독서모임 후기 (발제/북 리뷰) (0) | 2022.08.25 |
해러웨이 - 겸손한 목격자 (겸손한 목격자들, 임소연) (0) | 2022.07.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