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볼 영화 없는 날> 출간 기념 주저리

xooxin 2022. 1. 24. 20:26


책이 출간되었다. 2021년 하반기에 시작한 줄 알고 찾아보니 3월에 첫 미팅을 가졌더군. 출간까지 꼬박 10개월이 걸린 셈이다.
출간 제의는 편집자님이 먼저 해주셨다. <예민함을 가르칩니다>를 함께 작업한 편집자님이자 세상에서 가장 멋진 초능력자 편집자님이다. 청소년 쓰담 문고 시리즈로 영화를 페미니즘 관점에서 소개하는 책을 써보면 어떻겠냐 하셨고, 망고와 공룡까지 셋이 함께 작업을 하게 되었다.

책의 저자가 되는 일은 꽤나 우연한 기회에 시작된다. 예가다는 아웃박스 블로그와 한겨례 인터뷰를 보시고 제안을 주셨었다. 그 이후로 꾸준히 아웃박스를 컨택해주시는 여러 편집자님들 덕에 해설이나 추천사 등의 작업을 꾸준히 이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예민함을 가르칩니다> <열두 달 성평등 교실>에 공동 저자로 참여했고 <소녀들을 위한 내 마음 안내서>에 한국 저자로 참여할 기회를 얻었다.
<생리를 시작한 너에게>에는 짧은 해설을 실었고, 감수에 참여하거나 추천사를 쓴 어린이 대상 그림책도 여럿 된다.

그러나 여전히 부끄럽다. 내 글이 익명의 독자들에게 닿을 생각을 하면 얼굴이 화끈해진다. 시간과 돈을 들여 읽을 가치가 있는 글일까 고민한다. 이제껏 쓴 책들이 성평등을 주제로 독자들의 생각에 변화를 일으키거나, 새로운 생각을 제안하는 것이었어야 했기에 더 그랬다. 이번 글은 영화라는 소재가 있으니 조금 쉽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웬걸. 영화를 해석하고 페미니즘 관점으로 바라보는 작업은 몇 배로 고되고 복잡한 작업이었다. 한 편의 글을 쓰기 위해 수 많은 책과 자료와 기사를 찾아보고, 영화를 몇 번이고 다시 돌려보고, 세상에 나와 있는 영화 리뷰란 리뷰는 다 찾아보며 공부했다.

책을 쓸 때마다 나의 MBTI를 탓하게 되는데, ESTP의 특성상 메마른 감성으로 개조식 위주의 문장을 쓰는 것이 익숙하다. 요약 전문. 보고서 전문.
하지만 책은 그러면 안된다. 독자를 문장으로 붙들어 맬 수 있어야 하고, 내 감정을 충분히 드러내어 독자의 감정에 다가가야 한다. 내가 쓴 문장이 다이어리에 남기고 싶은 문장인지, 아무런 의미 없이 흘러가는 문장인지 고민해야 한다. 그냥저냥 이나저나한 불필요한 문장을 삭제하고 유의미한 단어와 문구들로 채우는 작업. ESTP에게는 쉽지 않다.

책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면, 영화 선정 작업만 한 달이 넘게 걸렸다. 영화 선정 기준은
1)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영화인가?
2) 청소년 관람이 가능한 영화인가?
3) 페미니즘 관점에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가?
4)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등 소수자를 혐오하거나 차별하지 않고 다양성을 존중하는가?
였다.

훌륭한 영화는 너무나 많지만 여성 청소년 입장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무겁지 않게 볼 수 있는 영화들이었으면 했다. 감독의 성별, 제작 국가 분포도 고려했다.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 등 장르의 다양성도 신경 썼던 것 같다. 물론 각자 "이 영화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꼭 넣어야 해!" 하는 토르픽, 망고픽, 공룡픽도 있었다. 그렇게 열일곱 편의 영화를 선정했다. 오히려 너무 많지 않게 추리느라 힘들었다.
토르픽은 <윤희에게>, 망고 픽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공룡픽은 <모노노케 히메> 이다. 각각의 글에서 영화에 대한 조금의 애정이 더 느껴질 수도 ㅎㅎ

원고 작업을 하면서 어릴 적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엄마와 아빠의 영화 스타일이 영 달라 부모님 두 분이서 영화를 보고 오셨던 일이 한 손으로 꼽을 정도로 적은데, 그 중에 한 번이었다. 부모님은 영화가 채 끝나기도 전에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너무 기분이 나빠 도저히 끝까지 볼 수가 없었다고 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영화는 김기덕 감독의 <나쁜 남자> 였다. 뛰쳐 나올만 했네...... 출연했던 여성 배우는 후에 영화 촬영으로 인해 인해 영혼이 다쳤다고까지 표현했다. 여섯 개의 영화제에서 수상한 그 영화는 '볼 만한 영화'가 아니었던 셈이다.

책의 가제는 원래 <볼 만한 영화가 없다> 였다. 영화관에 가도, 넷플릭스를 틀어도 도무지 볼 만한 영화가 없을 때 이 영화를 봐! 하는 의미였다.
그런데 영화를 찾다 보니 '진짜 볼 만한 영화가 없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렇지 않다. 불편하지 않은, 도전적인, 다양성을 존중하는 새로운 시각의 영화는 아주 아주 많았다. 우리가 잘 모를 뿐이었고, 박스오피스에 걸리지 않을 뿐이었다. 그래서 마지막에 책 제목이 바뀌었다. <볼 만한 영화가 없다> 에서 <볼 영화 없는 날> 로. 보다 긍정적인 의미로 다가가길 바랐다.

비슷한 류의 다른 책들은 저자들끼리 원고를 어떻게 맞추고 작업하시는지 잘 모르겠다. 이때까지 나는 늘 공동 저자들과 함께 원고를 돌려 읽고 피드백해주는 작업을 진행했다. 교정 교열의 의미보다는 서로 놓친 부분은 없는지, 오독할 문장은 없는지,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글인지 고민하며 결을 맞췄다. 장점은 글의 퀄리티가 상승한다는 거고, 단점은 혼자 쓸 때보다 몇 배로 더 오래 걸린다는 거...?
이번 책도 영화를 보고, 원고를 쓰고, 서로 피드백하고, 고치고, 지우고, 돌려 읽고, 주석 달고, 고치고, 또 고치며 함께 만들어 갔다. (물론 게으를 때도 있었다. 편집자님께 늘 죄송하다...) 거기에 늘 존경하는 손희정 님의 해설까지 함께 해 더할 나위 없이 멋진 책이 되었다. 타겟 독자는 여성 청소년이지만 많은 분들이 읽어주셨으면 좋겠다. 비판과 조언도 환영한다.

볼 영화 없는 어느 날, 이 책이 그대에게 닿길 바란다.